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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컬럼] 예술인 복지①-예술인 복지정책이 성공하려면[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예술인 권리보장법) 제정안이 2021년 8월 3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제정안이 가결되기까지 입법의 벽은 높았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와 예술계 미투 운동 등을 계기로 2017년부터 예술인의 권리침해 방지와 실질적 구제를 위한 법 제정 요구가 확산되자 2020년 5월에 예술계ㆍ국회ㆍ정부가 협력해 법안을 마련하여 발의한지 384일 만에 간신히 문체위 법안심사소위가 수정안을 의결했지만 결국 법사위 본회의에서 입법통과에 실패하고 20대 국회가 종료되었다. ‘예술인 권리보장법’은 예술인 권리침해 행위 및 성희롱·성폭력 행위의 금지, 예술인 권리구제 기구 설치, 피해자 구제 방안 등을 규정하고 있다. 대부분 자유 계약자였던 예술인은 근로기준법 등에서 보호를 받지 못했으나 이 법을 통해 법적 보호를 받게 됐다. 이 법의 적용을 받는 예술인은 '예술 활동을 업(業)으로 하기 위해 교육ㆍ훈련 등을 받았거나 받는 사람'까지 포함해 예술대학 학생 등 상대적으로 권리 보호에 취약한 예비예술인도 보호 대상에 들어 있다. 예술에 대한 지원은 첫째 예술 시설의 건립과 확충을 포함하는 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 둘째 바우처 사업과 예술교육, 생활예술 보급 확대 등 예술 향유자에 대한 지원, 셋째 생활보장과 사회안전망 확충 같은 보다 적극적 의미의 자립지원을 의미하는 예술가에 대한 지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에 따라 지금까지의 예술 지원은 예술 향유의 확대를 전제로 한 예술 프로젝트와 예술 향유자 지원에 중점을 두어왔으나 최근에는 예술인에 대한 인식의 확산으로 예술인 자체에 대한 지원 사업이 늘어나고 있다. 강석태 교수(수원대학교 대학원)는 ‘예술인 지원센터 사업의 차별화 방안’이라는 최근의 연구에서 예술인에 대한 인식 확산의 원인을 ‘예술인의 생활 안정’이라는 사회적 이슈가 부상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리고 인공지능 등장에 따른 존재론의 변화, 4차 산업 시대에 기술의 폭주에 따른 인간 소외 문제, 백세시대를 맞아 깊어가는 세대 간 소통의 어려움, 도시화 진전 가속화로 인한 메가폴리스의 삭막함 등 현대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와 관련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전환 등이 예술인에 대한 인식 확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했다. 예술인에게는 고무적이고 반가운 결과다. 10년 전인 2011년 11월 29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다수의 단편영화 제작과 국제영화제 수상 경력을 갖고 활동하던 촉망받던 32세의 故최고은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가 경기도의 어느 월세 단칸방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빈곤 속에서 갑상선 항진증과 췌장암을 앓으며 며칠째 굶주린 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뒤늦게 비보를 접한 영화노조에서는 ‘창작자의 재능을 착취하고 단지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쓰려하는 잔인한 대중문화산업 논리’를 비판한 성명을 내기도 했었다. ‘예술인 복지법’은 그렇게 온 국민을 울린 한 젊은 예술인의 가슴 아픈 죽음으로 인해 발의 되었다. 예술인복지법이 발효된 후 복지재단 설립을 비롯하여 예술인 복지와 관련된 법과 제도가 계속 제정되어 시행되었다. 2020년에는 ‘예술인고용보험’이 시행되었다. 내년부터는 올해 제정한 ‘예술인 권리보장법’이 시행된다. 그러나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8 예술인실태조사’에 나타난 예술인 가구의 총수입은 평균 4225만 원으로 국민 가구소득 평균인 5705만 원과 비교했을 때 1480만 원의 차이가 있다. 그중 예술 활동을 통한 수입은 1281만 원에 불과했다. 일부 경제적 성공을 함께 이룬 예술인도 있지만 예술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은 항상 가난하다. 천재 화가 이중섭이나 생전에는 단 하나의 작품밖에 팔지 못했다는 고흐의 작품들이 지금은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지만 생전의 그들은 극심하게 빈궁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도 많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했고, 불세출의 천재 모차르트도 항상 빚에 시달렸다. 예술가의 가난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가난은 숙명인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존재한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시행했다고 자랑하는 예술인복지법이 예술인들을 위한 실질적인 복지 증진이라는 제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재원의 확보가 중요하다. 예술에 대한 공적 재정 지원의 근거로 삼는 이론은 문화경제학자 보몰(미 W.J.Baumol)과 보웬(미 W.G.Bowen)이 연구하고 1966년에 발표한 “공연예술의 경제학적 딜레마”다. 제조업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력을 대체할 수 있지만 예술 분야에서는 사람을 기계로 대체할 수 없다. 산업은 규모가 커질수록 생산성의 증가 효과도 커지므로 이윤이 증가하지만 공연예술은 산업이 커져도 생산성 증가 효과가 미미하여 오히려 적자가 늘어난다. 1960년대의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풍요로운 강대국이었지만 예술에 대한 지원의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비영리적인 성격이 큰 공연예술 지원에 대한 부정적 압박이 대단히 심했던 상황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연구의 효시가 보몰과 보웬의 논문이다. 미국의 공연예술이 겪고 있는 재정 위기를 실증적으로 분석하여 공공지원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미국에서 예술의 공공성이 인정받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 논문은 정부의 예술지원을 반대하던 미국 의회를 설득하고 국가예술기금인 NEA(국립예술기금)가 설립될 수 있었다. 예술은 경제적 합리성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예술은 공공재고 가치재다. 예술의 사회에 대한 긍정적 생산 효과는 시장에 맡길 경우 과소하게 생산되므로 정부가 개입하여 공적인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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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암 정약전⑥ 손암을 만나기 위해 흑산도에 간 다산의 둘째 아들[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2020년 9월에 반가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한국한문학회 79집’을 통해 정민 교수(한양대학교)가 학계에 최초로 전문을 공개한 "새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와 기행시"다. 이 글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의 기행문과 기행시에 대한 논문이다. 학유는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 ‘농가월령가’, ‘시명다식(詩名多識)’ 등을 지었다. '부해기'는 학유가 24살 때에 아버지 다산의 뜻을 받들어 흑산도에 유배 중인 중부(仲父 둘째 큰아버지) 손암 정약전을 뵙고 돌아온 51일(1809년 2월 3일~3월 24일)간의 기행일기다. 이 일기에는 조선후기 흑산도 주민들의 생활모습과 지명이나 풍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들어 있다. 특히 손암의 적거지 이동과 불분명했던 연대기에 관련된 중요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이 자료는 손암 정약전 연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진을 출발해 영암에서 배에 올라 고초 끝에 흑산도에서 중부와 눈물의 상봉을 한 후, 공부를 점검 받으며 여러 지역을 유람하고 3월 1일에는 소사미(小沙尾) 마을 냇가 바위 위에서 술과 안주에 꽃지짐을 마련한 손암의 생신 잔치를 했다는 얘기 등 많은 부분들이 학술자료의 소중함을 넘어 놀랍고, 안타깝고 흥미진진한 내용이다. 그동안 학유의 흑산도 기행 내용은 다산과 손암이 쓴 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유배기간 중에 손암이 조카와 조우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정 민 교수는 이것을 국가의 죄를 입은 죄수 간에 중간에 자식을 두어 왕래 했다는 혐의를 피하려는 의도였던 듯하다고 보았다. 손암은 유배 전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잃고 하나 남은 아들 학초(學樵)가 있었다. 학유가 흑산도로 가기 전인 1806년경에 다산이 강진에서 형님 손암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초가 지난 경신년 겨울에 독서하는 걸 보니 이미 그애가 큰 그릇의 사람이 될 줄 알았습니다. 지난 해에 큰애(다산의 장남 학연)의 말을 들으니 앞서의 견해에 더욱 믿음이 섭니다. 올봄에 그애가 물어온 몇가지 조목을 보고서 놀라고 놀랐습니다. (중략) 제 생각으로는 금년 가을에 이곳 강진으로 데려와서 겨울 동안 가르치고 내년 봄에는 형님 곁으로 들어가서 모시고 있다가 4월이나 5월 사이에 돌아간다면 그애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잘 개발되고 방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아이 학유도 함께 와서 공부하고 가게 하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정해렴 역) 학초의 독서를 보니 큰 그릇의 사람이 될 줄 알았고 믿음이 간다. 가을에 학유와 학초를 강진으로 불러 가르쳐서 내년 봄에 흑산도로 보내 몇 달 형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다고 다산은 손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글을 받은 손암은 이렇게 답장했다. -이와 같다면 내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내가 기뻐서 잠이 오질 않네. 올 가을 데려오는 논의는 내가 권하지도 막지도 않으려네. 다만 모자의 뜻대로 하게 한다면 용기를 내더라도 여러 의논들이 많이들 말려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못할 걸세. 만약 남쪽으로 온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정 민 교수는 이 대목에서 “이 말에 따라 학유와 함께 강진으로 내려올 준비를 하던 학초가 짐을 싸던 중 홀연 병을 얻어 세상을 뜨자 아들의 남행을 기다리던 손암은 절망에 빠졌다. 결국 1808년 4월에 학유 혼자 강진으로 내려왔고, 해를 넘긴 1809년 봄에 다산은 둘째 아들 학유에게 학초를 대신해서 중부가 계신 흑산도로 찾아가 뵐 것을 부탁했던 듯하다”고 밝혔다. 학유는 '부해기'에서 2월 3일에 흑산도 방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임금 원년 신유년(1801) 겨울 가경 6년에 중부(仲父)이신 손암 선생께서 흑산도로 귀양 가셨다. 섬은 나주 바다 가운데 있으니 큰 바다를 천 리나 건너야 한다. 바람과 파도가 몹시 거세서 집안사람이나 부자간이라도 감히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였다. 정묘년(1807) 봄에 학초(學樵)가 조운선을 타려고 행장을 이미 갖추었으나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중부께서는 기다리시다가 달을 넘기고서야 궂은 소식을 들었다. 궁하고 외로운 처지를 슬퍼하다가 도리어 병이 되어 해를 넘기도록 앓아누워 아침저녁을 기약할 수 없었다. 무진년(1808) 봄에 내가 강진에 가서 거칠게 아버님을 봉양하였다. 아버님께서 내 손을 붙드시더니 울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래도 뭍에서 살아 주위 환경과 서책이 완연한 인간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저 구름바다를 바라보노라면 그 형편이 어떠하겠느냐. 네가 한 번 가서 뵙도록 해라’” 학초는 매우 총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다산이 쓴 '형자학초묘지명(兄子學樵墓誌銘 형님의 아들 학초의 묘지명)에 씌어 있는 학초에 대한 글이다. -학초는 형님 손암선생의 아들이다. 손암선생은 여러번 아들을 낳았으나 키우지 못하고 만년에 이 아들을 얻어 지극히 사랑하였다. 학초는 말이 조금 서툴렀다. 그러나 6~7세 때에 이미 서사를 읽고 그 득실을 의논할 줄 알았다. 보는 이는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바둑을 신묘하게 알아 7~8세에 이미 어른들과 대국하였는데 모두 강적으로 여겼다. 신유년(순조1년) 봄에 화가 일어나서 손암선생은 신지도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로 귀양갔다. 겨울에 다시 잡혀왔다가 다시 살아나 형님은 흑산도로 정배되고 나는 강진으로 정배되어 형제가 같은 길로 떠나게 되었다. 학초는 길게 땋은 머리로 화성의 남쪽 유천의 점사(작은점포)에서 우리를 전송하였는데 그 때 나이 11세였다. 집에 번국(중국)에서 가져온 사안주(구렁이눈) 1개가 있었는데 곧 큰 구렁이의 눈동자였다. 대체로 이 구슬이 있는 곳에는 뱀, 독사 따위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이 구슬로 비추면 뱀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죽어 마른 나무가 되어 버리니 기이한 보배였다. 학초가 울며 이 보배를 바치면서 "흑산도는 초목이 무성하여 무서운 뱀들이 많은 곳입니다. 이 구슬로 스스로를 보호하소서." 하니, 손암선생이 받아서 주머니에 넣는 한편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는 드디어 서로 헤어졌다. 내가 유배온 이래로 저술한 육경과 사서에 관한 학설 240권은 학초에게 전하려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 학초는 신해년(정조15년)에 태어나서 정묘년(순조7년) 가을 7월 19일에 죽으니 그 수가 겨우 17세이다.- 손암은 여러 아들들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잃고 늦게나마 얻게 된 아들을 몹시 사랑했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저술한 240권의 새로운 학설을 학초에게 전하려 했다는 것과, 학초에 대해 기술한 것들을 볼 때 그가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도 보통의 학문이 아니었다. 큰 아들 학유는 초의선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고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며 문필을 드높이면서 다산의 유배 다음해부터 아버지의 유배가 억울하다는 상소를 정약용이 해배 될 때까지 끊임없이 올린 인물이다. 둘째 아들 학유는 오늘날에도 조선시대의 인문학자로 분류될 정도로 많은 문헌을 남기고 있다. 두 아들 모두 유배 중인 아버지의 학문을 도왔던 뛰어난 학자들이었는데 이러한 두 아들이 있음에도 다산은 형님 손암의 아들 학초에게 자신의 새로운 학설을 전수코자 했을 정도로 학초는 총명했다. 손암이 흑산도로 귀양살이를 떠날 때, 학초는 열한 살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그의 집에는 중국에서 들여 온 큰 구렁이의 눈으로 만든 사안주라고 하는 구슬이 있었고 그 구슬이 뱀을 쫓는 대단한 효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안주 구슬을 어린 학초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아버지께 유배지에 뱀이 많이 있을 것을 염려하며 눈물로 손에 쥐어 드리는 어린 학초의 애처로운 모습, 그 어린 학초와 아버지의 그 눈물겨운 생이별의 모습을 다산이 학초의 묘지명에 기록하였다. 이렇게 애절한 이별을 나눈 아들이 7년 후에 장가를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고 말았다. 유배지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약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추측을 할 뿐 전해지는 바는 없었다. 이제 새로 공개된 "새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와 기행시"를 통해 많은 것이 밝혀졌다. 앞으로 흑산도와 손암 정약전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을 기대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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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잔여지매수 사례[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오늘은 지난번 시간에 이어 간접손실보상의 하나인 잔여지매수가 되는 사례를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골이나 준개발지를 지나가다보면 대문이 아닌 주택 현관 앞에 도로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건축을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도로교통의 위험으로부터 노출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현관에서 출입을 하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의해서 피격이 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음주차량에 의해서 주택 자체가 피격이 되는 경우도 있어 가끔 뉴스를 통해 집안에서 생활하던 일가족이 음주차량이 주택을 덮쳐 치상사고가 발생하는 경우의 소식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주택을 설치하는 부지의 협소로 인해 간간이 주택건축을 이렇게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지만, 실제 공익사업 또는 기반시설 설치사업으로 인해 주택의 토지 일부가 편입되어 이러한 사항이 발생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필자가 오늘 말씀드리는 요지는 사전에 방지를 하면 이러한 부정형의 토지 및 위험토지를 잔류시키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또는 이에 준하는 공공기관이 사업을 시행한다면 어떠한 조치도 하지 못한 채 수용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늘의 시간은 잔여지매수가 되는 경우의 사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잔여지 매수의 요청시기는 관련법령과 지침상에 토지수용위원회의 수용재결이 있기 전까지라고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74조에 명시되어 있지만, 실제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규정 중 공사가 완료되기전까지 간접보상에 대한 문제점을 따질 수 있습니다. 혹시 수용재결이 종료되었다고 하더라도, 해당공사가 계속 진행 중일 경우 사업시행자에게 명확한 자료와 청구취지를 작성하셔서 잔여지 매수청구를 해보시는게 좋을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각론으로 하고 잔여지 매수가 되는 경우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잔여지매수가 궁극적으로 되는 경우는 편입 및 수용되기전에 해당토지의 목적의 판단이 주가 됩니다. 편입되기 이전의 토지가 전ㆍ답으로 사용했는데 편입되고 나서는 규모의 협소로 전ㆍ답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 편입되기 전에 주택으로 기능(안전성, 능률성, 괘적성)을 상실하는 경우, 상가로써 주차장 부지의 편입으로 상가의 적합성이 떨어진 경우, 과거부터 상당한 시간을 특정물을 포함한 상호를 사용(예 : 감나무골 방앗간 등)하였는데 주변지역의 개발로 더 이상 감나무골 상호를 못사용하는 경우 등 이 있습니다. 일반인으로서는 사업 시행으로 인해 목적취지가 변질됐는지, 사용수익이 제한됐는지 판단하기가 애매할 수 도 있습니다. 또한 잔여지 매수청구가 될 수 있는지도 판단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여러 가지의 경우를 자신의 상황과 비교하여 볼 때 혹시 자신의 상황과 유사하거나 동일하게 적용될 경우는 해당개발 및 사업에 주 사업을 시행을 하는 자에게 청구를 하여 최소한 불이익이라도 방지하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되어 말씀드립니다. 혹시, 잔여지 매수에 좀 더 자세하게 알고싶은 경우는 주변에 토지보상을 전문으로 하는 행정사 등의 전문가에게 문의하시면 자세하게 설명 받을 수 있을 것이니, 이점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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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처분 대응에 대한 세부대응절차 ③[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오늘은 지난번 제시했던 행정처분 대응에 대한 마지막 시간으로 행정쟁송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 처분청의 행정처분 절차 진행단계에서 의견서ㆍ이의신청ㆍ청문의 절차를 활용하여 처분을 대응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으나, 종래 적으로 처분청의 처분이 확정된 상태에서는 처분을 받은 자로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을 할지 정말로 패닉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에 도움을 드리고자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현 처분청에서는 행정처분을 할 경우 절차중시 강화 및 강조로 인해 처분결정통지 또는 행정처분통지서에 반드시 행정쟁송 고지를 하고 있습니다. 통상 ‘이 처분을 받은 후 90일이내 행정심판 및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라는 명시방식의 안내고지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 행정처분을 받는 경우나 일반인인 경우는 이 고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으며, 그나마 인터넷을 통해 이 고지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소하게 찾아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고지를 관련자들은 '행정쟁송 고지' 라고 하며, 행정쟁송은 대한민국 헌법 제107조 제3항에 따라 재정된 절차로써 법률 심리인 재판의 전심절차로써 행정기관에서 그 행정처분을 다시 검토하게 하여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행정권의 자주성을 존중하기 위한 하나의 행정심리 절차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행정심판법에서는 모든 행정처분에서 행정심판을 진행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공무원에 대한 징계 및 불이익처분, 각종 세법상의 처분 (지방세는 제외), 운전면허 취소ㆍ정지 등의 행정심판전치주의 분야에 해당하는 경우는 반드시 행정심판을 걸친 후 행정소송으로 진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행정심판을 청구하기 위해 단지 행정심판 법률의 청구서만 작성할 것인가? 아니면 추가적인 자료도 작성할 것인가? 이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이 발생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행정처분 세부대응절차에서 구구절절이 처분의 부당성을 제기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행정심판청구 또한 이 부분을 간과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행정심판청구서와 별도로 행정처분의 청구취지와 청구내용, 처분의 부당성을 주장하셔야 하며, 특히 처분의 부당성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이 주장과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여 심판위원들을 논리적으로 이해 및 설득해야만 인용 또는 부분인용이라는 심리결과를 받아 행정처분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 부당성 부분의 주장은 법률의 적용 형평성, 대법원 판례, 처분청의 재량남용, 법률의 오해해석 여부 등의 정량적 기준부분과 이 처분을 통하여 본인이 받게 될 불이익 정도, 본인의 사정 등의 정성적 부분을 통합하여 작성하셔야 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과거의 지방자치단체 등의 처분청에서는 공익을 가장한 편익추구의 행정절차가 많았으나, 지금은 법률에 근거한 행정절차가 정립된 시대적 상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법의 실현과정에서 평등이 아닌 형평의 원칙이 크게 적용되는 관계로 같은 처분을 가지고도 해석하기에 따라 차등적인 처분이 부과될 수 있음을 유념하셔서 세밀하게 작성하여 청구하신다면 행정처분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본 전문가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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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커뮤니케이션 (Good-communication), 나는 오늘 상대에게 몇 번이나 좋은 말을 했는가?[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습관이 무엇인지 알고, 또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관계 속 커뮤니케이션도 마찮가지이다. 나도 모르게 잘못 말하거나 대화 도중 특이한 행동으로 상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는 몸에 밴 잘못된 습관이다. 더욱이 긴장을 하거나 어려운 자리에서 말을 할 때는 안 좋은 습관이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무의식중의 나쁜 습관을 인지하고 의식적으로 고쳐 나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때그때 꼼꼼하게 체크하고 다듬어서 행동으로 옮겨야 비로소 달라진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승리하고 싶어 한다. 커뮤니케이션에서의 진정한 승자는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자로서 좋은 말을 건네는 사람,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밝은 표정과 기분 좋은 마음으로 전하는 말은 긍정 에너지를 생성시키며 어느 공간이든 환하게 밝혀준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만 가득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게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달력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부분이다. 평소 얼굴이 경직되어 있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이들은 의도하지 않게 상대에게 불편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입 근육에 힘을 주고 윗니를 많이 보이는 훈련이 있는데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또한, 획기적 이라고 할 수 있는 종이컵 발성법은 빈 종이컵의 뒷면을 뜯어서 입에 물고 한 글자 한 글자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는 것이다. 마치 쉬운 놀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다. 1분 정도 진행하면 나도 모르게 침이 주르륵 흐르고 양 옆 입 주위에 자국이 남으며 근육도 당길 것이다. 그건 그만큼 입 주위 근육인 구륜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 또한 꾸준한 연습만이 지름길이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내 얼굴 표정이 다양해지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데 인지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야말로 환희이다. 항상 우울한 기운이 맴도는 사람에게는 안 좋은 일이 생길 확률이 높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도록 마인드를 바꿔보자. 우리 주변에는 자신감이 없어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평소 수줍음이 많거나 숫기가 없는 사람들은 등이 휘어지면서 어깨도 좁아 보여 굉장히 소극적인 인상을 준다. 따라서 가슴을 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는 바른 자세를 구축해야 한다. 벽에 발뒤꿈치, 엉덩이, 어깨, 머리를 붙이고 오래 서있는 연습을 해보자. 바른 자세는 목소리가 멀리 나갈 수 있는 공명을 가능하게 하고 명확하고 선명한 음성을 만들어 준다. 고민이 많아 얼굴이 어두운 사람들은 마음에 벽을 쌓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있기 마련이다. 소설가가 되어 새드 엔딩을 그리며 한없이 힘들어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이 세상에서 나 만큼 나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고, 또 나 자신 만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없다. 고민이 많아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는 이들에게 다음의 방법을 추천한다. 종이와 펜을 꺼내어 말 못할 고민이나 스트레스를 찬찬히 모두 적어본 다음 갈기갈기 찢어서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종이가 나를 떠나는 순간 나를 괴롭혔던 고민도 어느 정도 사라질 것이다. 결국 나의 고민은 ‘나’ 스스로 풀어 내야만 한다.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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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위기로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무대를 지켜주세요ⓛ[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역병의 시대에 예술의 가치에 관한 단상 (예술가, 그들이 지불하는 댓가) 예술이 모든 사람의 삶을 풍족하게 한다는 데에 대한 이견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 의식주에 예술적 품격이 더해 져야 비로소 ‘풍족’ 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되고 그걸 느끼게 될 때 그 단어 ‘풍족’ 과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사람이 생존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예술이 담당하는 가장 큰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시작부터 새해를 맞은 지금까지 겪고 있는 코로나의 절박한 상황은 모두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문화, 예술계 종사자들의 절박함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지 오래됐다. 그래서 우리가 평범하게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생각하는 의식주와는 다른 것으로도 인식되기도 한다. 결과가 어떤 것이든 문화, 예술은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모든 것에 포함된다. 그래서 그 ‘공감’ 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환경이 절대적인 것이 된다. 2020년 ‘비대면’ 이 강요 되는 시간들은 ‘공감’ 에 대한 장벽을 한층 두텁게 만들었고 문화, 예술계를 일방적인 전달만이 가능한 환경으로 몰아넣었고 강요하게 되었다. 표현법의 극대화를 가장 큰 미덕으로 살아오던 문화, 예술계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인 오감 중에서 화면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만들고 그런 제약들로 공감의 수단을 빼앗긴 예술가들은 어떻게든 표현하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지만 그 해결법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예술가 자신의 시간과 생각과 가능한 모든 것을 갈아 넣은 것이 예술이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위해 극단의 효율성을 추구하지만 예술은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다. 모두 알고 있지만 사람의 공감은 자본으로는 만들 수 없는 무형이고, 자본으로 환산하기 힘든 영역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환경에서 생존만을 위해 현재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 생존만을 위해서 1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문화, 예술은 완전히 메마른 환경에 놓이게 됐다. 생존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당신의 삶도 ‘풍족’ 이라는 단어와 점점 멀어져 간다. 2020년 예술인 고용보험이 발효됐다. 그 전에 2012년 누군가의 죽음으로 예술인 복지법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사회적 장치들의 혜택을 받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누군가의 삶을 갈아 넣어 만들어진 법은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정말 절박하게 필요한 예술가를 수용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법의 사각지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다. 이제 예술가의 모든 것을 갈아 넣은 ‘작품’ 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예술을 당신이 즐기고 있을 때 그걸 만든 사람들이 지불한 댓가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역병이 창궐하고 서로 만나야 얻을 수 있는 모든 부분에서 최소한의 공감조차 얻지 못해 당신의 삶, 생각들이 피폐해 질수록 그 삶을 그나마 살아갈만 하다고 느끼게 해줄 문화, 예술은 생존과 이익만을 위한 사회에서 점점 더 시들어간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IMF시기 개봉한 1998년작 타이타닉 영화에서 침몰하는 배에서 마지막 연주를 하는 악단의 모습처럼...... 침몰해 가고 있는 지금 지쳐 있는 당신의 공허함, 공감 결핍을 채워 줄 그 무언가를 위해 예술가들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스스로의 삶을 갈아 넣고 있다. 지금 자신들이 처음 겪어 보는 최악의 환경에서, 표현법의 제약까지 받으며, 끝 모를 시간에 스스로의 생존 조차 잊으며.....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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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학력차등ㆍ직업 귀천의식 없다[전문가컬럼=한국복지신문] 김경화 기자= 집값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 기간에 상승하면서 우리 서민들에게 큰 타격이 왔다. 집값이 미쳤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집값이 왜 오르는지 생각을 해 보면 가장 큰 이유는 나이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나 다 서울을 향해서 가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난 2018년 대통령 유럽 순방에 한ㆍ이탈리아 장인 사절단에 선정이 되어 이탈리아 명품 장인 기업들을 방문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명품 브랜드가 가장 많은 나라에서 우리나라 장인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사절단이 꾸려지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의식은 우리와 너무도 달랐다. 가장 특이한 점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학력의 차등이 없으며, 직업의 귀천의식도 없다. 우리처럼 입시 지옥도 없고 꼭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탈리아는 대학 진학률이 20% 정도로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낮다고 한다. 교육비 부담이 적고 누구든 희망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탈리아와 달리 교육비도 높고 치열한 입시 지옥에 시달리면서 대학 진학률이 70%가 넘는다. 그러면서도 취업도 어려운 현실이다. 여기에서 이탈리아가 명품 브랜드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있었다. 이탈리아 젊은이들은 고등학교 진학률도 인문계보다는 실업계가 높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거나 각 분야의 전문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자동차 기술고등학교, 솔로메오 장인학교 등 각 분야의 전문학교에 들어가서 숙련된 기술을 익히고 배워서 일찍부터 취업을 하고, 본인이 원하는 분야에서 종사한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은 취업을 고향에서 일하기를 바라고 살아간다고 한다. 국민의 73.3%가 고향에서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처럼 무조건 대도시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들의 직업 마인드에 너무 놀라웠다 그들의 직업 마인드가 작은 도시를 살리고 명품 중소기업이 많은 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중소기업들이 많은 이유가 젊은 장인들이 일찍부터 고향에서 일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방문한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캐시미어 니트 브랜드도 솔로메오 장인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중부지역 움브리아주(Umbria) 작은 마을 솔로메오(Solomeo)에서 14세기 말에 지어진 낡은 성에 사무실과 공장을 만들어 본사를 이전하고 주변의 오래된 건물을 현대적으로 복원하여 지역 주민들을 고용하여 휴먼경영으로 지역민들과 함께 지속성장의 요인이 되는 바람직한 사례였다. 파가니 자동차 본사가 있는 모데나(modena)는 18만의 작은 도시에 본사가 있다. 모데나(modena)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자동차 회사들이 있고 발사믹 식초, 페라리, 람보르기니, 파가니 등 수제 자동차 공장들이 있다. 이곳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다양한 명품을 일찍부터 배우고 익히는 우수한 기술을 갖춘 장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명품브랜드를 유지해 나가는 원동력이었고 힘이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작은 마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젊은 장인들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젊은 나이에 한 분야에 종사하다 보니 작은 마을도 지속 발전 할 수 있었고, 지금의 명품의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라는 것을 알고 나니 젊은이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는 시간들이었다. 우리나라 전국 시군의 3분의 1이 30년 안에 사라진다고 하는데, 지금의 부동산 정책이 무조건 집값 만 잡는 게 아니라 여러 문제점들을 같이 해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고 배우는 시간들이었다. 이탈리아를 이끄는 중소 장인기업 140만 개들을 보고 장인의 힘과 희망도 느낄 수 있었다. ◈본 칼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