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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㊸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 3[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㊸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 3 느리지만 쉬지 않고 변화해 온 여성의 사회적 지위 세상은 세 살 버릇 여든 가듯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시야를 넓히고 생각을 높이 올려 과거의 시간들을 조감(鳥瞰)해 보면 아직 턱없이 부족할지라도 세상은 분명히 변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얼마나 변했을까? 역사적으로 그 어느 때도 쉽게 변화가 이루어진 경우는 결코 없었다. 변화에는 언제나 매우 강력한 현실적 저항이 따라다녔다.. 18세기 후반의 유럽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 인간에게는 이성(理性)이 우선이며, 이성이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남성들의 경우에만 적용될 뿐 자연과 여성의 이성은 남성에 종속되는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는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조차도 ‘인간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을 통해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향유권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인간의 신념을 강조하였지만, 이것을 여성에게는 적용시키지 않았다.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고집하고 여성을 남성과 차별하였다. 이로 인해 루소는 여성의 종속을 고착화하였다는 남녀평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다. 루소의 여성교육 필요성 선언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도 루소는 “여성은 성(性)에 있어서만 남성과 다를 뿐이지 종(種)에 있어서는 동등한 인간이다.”라고 규정하고, “성적(性的) 차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동등하므로 여성도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여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특성에 맞추어 여성만의 독자적인 교육을 받아야한다.”고 선언하여 부정적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덜게 되었다. 여성교육에 대한 관심과 제도의 제정은 유럽에 널리 유포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테레지아 여제가 1770년대 후반부터 실시한 여아교육에 대한 교육개혁의 시작과 테레지아가 사망하기 직전인 1780년에 아동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이 전국적으로 500여개에 이른 것도 계몽주의 사상의 확대로 얻게 된 교육제도 변화의 하나였다. 프랑스 여성들의 ‘살롱 문화’ 유럽 사회에서 계몽주의 사조의 확산은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여성의 역할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프랑스의 경우는 상류층 여성(madame)들의 주도로 살롱(salon) 문화가 형성되어 계몽주의 사상이 무르익는 마당이 되었다. 남녀가 출입할 수 있는 살롱의 분위기는 여성들이 주도하였고, 살롱 문화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학문 수준은 남성들과 대등하였다. 프랑스에서 시민계급 여성들이 이룩한 ‘살롱 문화’의 성공은 비록 일부였지만 개별적인 여성들이 여러 영역으로 전문화되어 계몽 시기의 진보적 작가들을 후원하고 보호하였다. 그러나, 살롱에서의 여성의 학문 분야는 교양과 취미의 분야를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공식적인 가치와 지위를 확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당시 프랑스 여성들도 자유와 평등의 지위를 실현할 수 없었다. 18세기가 다가도록 여성에 대한 불평등은 지속되었고 이러한 상황의 탈피를 위해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자세로 혁명에 적극인 협조와 지지를 수행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쉽게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경우도 이러한데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분위기와 그러한 환경에서의 아우에른함머의 음악활동 상황은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에른함머의 도전과 영역 확대 아우에른함머가 1786년에 전격적인 결혼을 실행하자 모차르트를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아쉬움과 함께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그간의 열정적인 음악활동과 재능에 대한 단절이 안타깝기 때문이었다. 1786년 12월 13일에 큰 딸 마리안네 클라라가 태어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1788년 8월 15일에는 둘째 딸 마리안네 바바라 클라라를 출산했다. 결혼과 두 번에 걸친 출산에도 불구하고 아우에른함머는 음악을 향한 몸부림을 다시 시작하였다. 새롭게 출발하는 그녀의 행보는 더욱 진보적이었다.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야하는 관습을 타파하고 자신의 이름을 계속 사용하며 ‘아우에른함머’로 활동을 전개했다. 1793년부터 1813년까지 매년 대형 아카데미 음악회(Great Musical Academy)를 기획하여 개최하였다. 또한, 빠지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작곡하거나 편곡한 곡으로 연주자로 출연했다. 모차르트는 1782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791년까지 10년 동안 자신의 모든 소나타sonata와 아리에타arietta(소규모의 아리아)를 아르타리아(Artaria) 출판사에 공급하는 전체 과정을 아우에른함머에게 맡겼다. 이 임무는 악보와 원고에 대한 전반적인 교열과 감수가 포함된 작업이었다. 이것은 아우에른함머의 인격과 총괄적인 음악적 지식 그리고 책임감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작곡가이자 음악기획자 그리고 피아노 비르투오소Virtuoso 아우에른함머는 작곡가이자 음악기획자 그리고 피아노 비르투오소Virtuoso였다. 비르투오소는 출중한 실력과 지식을 갖춘 예술가를 뜻하는 말이다. 그녀는 빈곤한 삶과 어려운 현실 상황에서도 시대의 저항을 뛰어넘어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진보적인 활동으로 삶을 채워간 음악가이다. 그녀가 남긴 수많은 곡 중에서 현재 ‘헝가리 주제에 의한 6곡의 변주’가 유일하게 온전한 상태로 출판되어 남아있다. 다음은 피아니스트 주디스 파이퍼 Judith Pfeiffer가 연주하는 ‘아우레른함머의 헝가리 주제에 의한 6개의 변주곡’이다. 아우레른함머의 헝가리 주제에 의한 6개의 변주곡 Josepha Barbara von Auernhammer - 6 Variations sur un Theme Hongrois 1.Theme 2.Variation 1 3.Variation 2 4.Variation 3 5.Variation 4 6.Variation 5 7.Variation 6 https://youtu.be/wx-QqdnSjQY?si=BAgvtffCkMbqFJ4x 주디스 파이퍼 Judith Pfeiffer 피아노 연주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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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㊷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 2[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㊷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 2 막시밀리안 슈타들러(Maximilian Johann Karl Dominik Stadler, 1748~1833) 모차르트와 그의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의 음악에 대한 행보는 오스트리아의 음악가이자 베네딕도 수도회의 사제였던 막시밀리안 슈타들러와 그의 자서전을 통해 알아 볼 수 있다. 슈타들러는 18세기와 19세기 초 빈(Wien) 음악계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슈타들러는 1748년에 멜크(Melk) 시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베네딕도 수도회 멜크 수도원에서 첫 음악교육을 받았다. 1758년(10살)부터는 삼촌이 수도자로 있는 시토수도원에 입학하여 클라비코드와 오르간을 배웠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음악저널이었던 ‘빈 음악신문(The Wiener Allgemeine Musical Zeitung)’에는 체코 출신의 작곡가이자 음악교사였던 코제루크(Leopold Anton Koželuch, 1747~1818)에게 피아노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슈타들러는 1766년(18살)에 멜크 수도원에 들어가 1767년에 서원을 하고 1772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훌륭한 음악가의 자질을 키워가던 슈타들러는 멜크 신학교의 교수로서 신학과장을 역임하고, 1786년부터 수도원장을 맡았지만 요제프2세 황제의 허가 거부로 시토회의 수도원으로 옮겼다가 린츠(Linz)로 갔다. 린츠 주교의 배려로 빈으로 간 슈타들러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빈의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활동에 전념하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물론 프란츠 슈베르트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자서전에는 당신 빈의 음악계에 관한 상황이 자주 묘사되어 있다. 특히 모차르트와 아우에른함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작곡가이며 음악학자로 명성을 떨친 슈타들러는 그의 자서전에서, “모차르트가 빈으로 와 여섯 곡의 클라비어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Sonata for Klavier & Violin K.296, K.376-K380)를 아르타리아 출판사에서 제작하여 그 소나타들을 아우에른함머에게 헌정하였습니다. 그 무렵에 나는 그들의 연습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르타리아는 첫 인쇄본을 가지고 왔고, 아우에른함머는 피아노를 쳤습니다.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대신 그 옆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쳤습니다. 나는 스승와 제자인 두 사람의 연주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살아오면서 그와 같은 훌륭한 연주는 처음이었습니다.” 라고 적었다. 모차르트가 요제파 아우에른함머에게 여섯 곡의 소나타를 헌정한 시기는 1782년 6월이었다. 슈타들러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와 관련된 수많은 글을 썼다. 특히 모차르트 레퀴엠(진혼곡)의 진위성에 대한 입증과 변호에 큰 역할을 하였다. 모차르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No.17, C Major K.296 Mozart: Violin Sonata No.17, C Major K.296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연주 1999년 7월 30일 부산문화회관 https://youtu.be/NtrHF78F4AY?si=MhWCVDROFFR_dQp2 여기를 누르세요 모차르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376 1악장 Mozart: Violin Sonata K.376 mvt.1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연주 2020년 1월 31일 서울아트센터 IBK홀 https://youtu.be/018hsiYMG5s?si=vhkF8G9Ptv4x1BlQ 여기를 누르세요 아르타리아(Carlo Artaria, 1747~1808)와 아르타리아 출판사(Artaria & Co) 아르타리아 출판사(Artaria & Co)는 이탈리아 사람 아르타리아(Carlo Artaria, 1747~1808)가 1770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였던 빈에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미술과 지도(地圖)를 주로 출판하였으나, 1778년부터 음악을 포함하는 사업으로 확장하였다. 역사상 중요한 초기 사업은 요제프 하이든과의 협력으로 하이든의 작품 300여 곡을 출판하여 판매한 일이었다.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Op.33)으로 시작된 아르타리아 출판사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출판사로 성장하였다. 하이든의 작품 가치는 아르타리아가 최고의 출판사로 발전하여 고전음악 시대의 모든 주요기업들과 연결이 되었고,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1805)와 모차르트 같은 매우 중요한 클래식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1793년부터 아르타리아는 베토벤의 초기작품들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1803년, 아르타리아는 베토벤의 현악 5중주곡의 출판권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법정 소송은 180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에도 아르타리아는 1819년에 베토벤의 함머 클라이버 소나타(Hammer klavier Sonata)를 출판했다. 1826년에는 베토벤의 현악4중주곡(No.13 B장조 Op.130)을 편곡하여 대푸가를 위한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Grosse Fuge, Bb Major Op.134)을 출판하였다. 아르타리아와 베토벤의 분쟁은 음악사에서 초기 저작권법의 확립과 불법 복제 문제에 대한 저작권 보호에 대한 구체적 결정에 도움을 준 역할로 평가하고 있다. 아우레른함머의 열정적인 활동과 모차르트의 지속적인 지원 1782년, 모차르트가 아우에른함머에게 여섯 곡의 소나타를 헌정하고 함께 귀족들의 집을 방문하며 레슨과 연주회를 열어가던 중에 아우에른함머의 아버지 요한 미햐엘 아우에른함머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요제파 아우에른함머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모차르트는 자신이 하숙하였던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아우에른함머가 머물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졸지에 어려움을 겪게 된 아우에른함머의 심리적ㆍ경제적 곤란은 매우 심각했다. 부풀었던 파리 계획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열정과 집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1782년 11월 3일에 캐른트너토르 극장(Kärntnertortheater)에서 예정된 아카데미 연주회를 스스로 기획하여 준비하는 것을 지켜 본 모차르트는 신부인 콘스탄체와 잘츠부르크를 방문하기로 한 계획을 연기하면서까지 음악회 헙연을 진행하였다. 아우에른함머의 추진력은 대단했다. 1784년 10월31일과 1785년 2월 24일의 아카데미 연주회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하였다. 물론 모차르트도 제자를 위해 모든 음악회에 빠짐없이 협연을 도와주며 우정과 음악적 협력을 다했다. 1786년 5월 23일, 시대의 편견과 사회의 여성 차별을 넘어 파리로 진출하여 마음껏 공부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음악만을 위해 살기로 굳게 다짐했던 요제파 아우에른함머는 자신보다 일곱 살 연상인 빈의 치안판사 요한 베세니히(Johann Bessenlg, 1752~1834)와 결혼하였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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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㊶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 1[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요제파 바바라 폰 아우에른함머(Josepha Barbara Auernhamme, 1758~1820) 모차르트는 1781년(25살), 빈(Wien)에 정착했을 때 생계를 위해 그해 여름부터 개인지도를 시작하고 귀족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레슨과 저녁 음악회를 열었다. 그때 두 명의 백작부인과 함께 레슨을 받기 시작한 요제파 바바라 아우에른함머는 오스트리아의 실업가이며 빈의 경제위원인 요한 미하엘 폰 아우에른함머(Johann Michael Auernhammer, 1719~1782)의 딸이었다. 여제자 아우에른함머가 모차르트를 비롯한 여러 이름 높은 음악가들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엘리자벳 아우에른함머(Elisabeth Auernhammer, 1723~1802)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 엘리자벳은 빈의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팀머(Franz Joseph Timmer, 1697~1731)는 평생을 궁정악단에서 일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아우에른함머는 모차르트를 만날 당시에 이미 하이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유명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내고 피아노외에 작곡과 음악이론도 함께 가르치며 자신의 지도로 날로 성장하는 모습에 기쁨을 느꼈다. 모차르트는 1781년부터 1785년까지 그녀를 연주파트너로 삼아 성공적인 연주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모차르트는 몇 달 후에 잘츠부르크에 있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여제자 아우에른함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 빈에서, 1781년 6월 27일 …… 바로 지금, 카우니츠 후작(오스트리아의 나폴리 주재 대사)의 비서 히페 씨 댁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 사람은 매우 친절하고, 제게 참 좋은 친구입니다. 직접 저를 방문했기에 그때 연주를 들려줬습니다. 제가 묵는 집에는 피아노가 두 대 있습니다. 한 대는 우아하게 치기 위한 것이고, 또 한 대는 우리가 런던에서 사용했던 것처럼, 낮은 옥타브도 동시에 울리도록 조율된 오르간 비슷한 악기입니다. 저는 이 악기로 광상곡과 푸가를 쳤습니다. 거의 매일, 식사를 마친 뒤에는 요한 미하엘 아우에른함머(요제파 아우에른함마의 아버지) 씨 집으로 갑니다. 그 댁 따님은 그야말로 괴물 같습니다. 그런데 연주할 때는 황홀한 소리를 냅니다. 즐겁게 연주하지만 그녀는 ‘칸타빌레’의 아주 순수하고 경쾌한 감정이 조금 부족합니다. 이 사람은 제게 자신의 계획을(비밀이라며) 토로했습니다. 앞으로 2, 3년 동안은 착실히 공부하고, 그다음에는 파리에 가서 연주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저는 아름답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못생겼죠. 3, 4백 굴덴 정도 받는 관청의 간부 따위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고, 다른 남자도 구해질 것 같지도 않네요. 그러니 이대로, 자신의 재능으로 살아가고 싶어요(그러나 결국 1786년에 그곳 공무원과 결혼했다)”라는 겁니다.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제게 도움을 청한 겁니다. ...... 아우에른함머는 모차르트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밝혔다. 음악적 재능으로 성공하기 위해 결혼도 포기하고 2, 3년을 공부한 후 음악의 주무대인 파리로 진출하여 전문음악가의 인생을 살겠다는 것이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녀의 포부는 시대와 제도를 뛰어넘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계몽주의의 흐름 속에서 진보와 혁신에 서서히 물들고 있던 모차르트는 그녀의 꿈을 지지했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448’과 ‘이중협주곡 K.365’ 1781년 11월 23일 빈의 파사우에르호프(Wien Passauerhof)에서 열린 하우스콘서트(House Concert)에서 모차르트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448’과 ‘이중협주곡 K.365’를 연주했다. 놀라운 것은 제1피아노 파트를 아우에른함머에게 맡기고 자신은 제2피아노 파트를 연주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테크닉에 대한 인정과 연주 경력을 위한 배려였다. 연주는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추가 연주회는 1782년 1월과 5월 26까지 이어졌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다니엘 바렌보임’ 1940년대 초반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두 명의 살아있는 전설적인 음악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1941~ )와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은 고향 친구이자 음악적 동반자다. 그들은 2014년 4월 20일에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역사적인 네 손(four hand) 피아노연주회를 가졌다. 다음은 두 사람이 연주한 Mozart: Sonata for Two Piano, K.448(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연주 실황이다. Mozart: Sonata for Two Piano, K.448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448 https://youtu.be/9iePyP2HOr8?si=Wj864hAESNZ08Bkh 위를 누르세요 ‘루크 유센’과 ‘아서 유센 루크 유센(Lucas Jussen, 1993~ )과 아서 유센(Arthur Jussen, 1996~ )은 네덜란드의 형제 피아노 듀오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대중 앞에서 가각 독주자로서 연주활동을 해 왔으며 자주 피아노 듀오로 함께 활동해왔다. 그들의 어머니 크리스티안 겔더(Christianne van Gelder)는 플루트 교사이고, 아버지 폴 유센(Paul Jussen)은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팀파니 연주자다. 형제는 2006년 11월 24일과 2009년 11월 30일에 네덜란드 라디오 챔버 필하모닉과 함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했다.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2010년 3월 12일에는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와 녹음계약을 체결하고 현제 네덜란드 챔버 오케스트라의 상임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그들이 연주한 Mozart: Concerto for Two Pianos, K.365(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연주 실황이다. <열정 여제자 아우에른함머 2로 이어짐> Mozart: Concerto for Two Pianos, K.365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https://youtu.be/KM2WP4DztCo?si=M3MC73RlFWCt0Fay 위를 누르세요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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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㊵ 시각장애 여성음악가 파라디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의 제자들 이론보다는 실제 연주로 가르치기를 즐겨했던 모차르트가 빈에서 함께 한 제자들을 살펴보면 오르간 주자이자 작곡가로 런던 필하모닉 재단의 공동 창립자이자 지휘자였던 애트우드(Thomas Attwood, 1765~1838)와 주로 고전시대 오페라로 널리 알려진 스토레이스(Stephen John Seymour Storace, 1762~1796), 그리고 빈의 작곡가이자 피아노 교사였던 프레이슈태틀러(Franz Jakob Freystädtler, 1761~1841)를 꼽을 수 있다. 에트우드와 스토레이스는 영국에서 빈으로 건너왔다. 여성 제자로는 요세파 바바라 아우언함머(Josepha Barbara Auernharmmer, 1758~1820),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Maria Theresia Paradis, 1759~1824), 바베테 플로이어(Babette Ployer, 1765~1811)를 들 수 있다. 모차르트의 제자들에 대한 연구결과는 현재에도 많은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다만, 추정은 가능하나 실증에 어려움을 겪는 분야가 바로 여성 제자들에 대한 부분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계몽주의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시민계급의 각성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음악의 역할은 시민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예술로 꾸준히 성장하였다. 빈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계에도 이러한 흐름위에 이따금 나타났던 재능 있는 여성음악가의 시대를 이겨낸 도전의 결과물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민계급 여성의 등장은 시민계급 여성음악가의 탄생과 성공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빈 음악가협회(Wine Tonkünstler Societät)를 통해 열린 음악회와 아카데미의 기록물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시각장애 여성음악가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 모차르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Maria Theresia Paradis, 1759~1824)는 시각장애 여성음악가로서 유럽 여러 나라의 여성과 동료 음악가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이 되고 그들로부터 많은 인기와 깊은 존경을 받았다. 파라디스는 오스트리아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서이자, 오스트리아 정부 참의원과 의장을 지낸 요제프 안톤 폰 파라디스(Joseph Anton von Paradis, 1733~1808)의 딸로 태어났다. 안톤 파라디스를 매우 신임했던 테레지아 황후는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의 대모(代母)를 자청하고 친자식처럼 사랑을 쏟았다. 파라디스는 안타깝게도 세 살에서 다섯 살 때로 추정되는 시기에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황후는 후견인으로서 불쌍한 대녀(代女)를 위해 최상의 음악교육을 받도록 아낌없이 배려하였는데, 파라디스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와 노래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소녀 신동’으로 불렸다. 1770년에는 11살의 파라디스가 대모인 황후 앞에서 40여분이 소요되는 페르골레지(G. B. Pergolesi, 1710~1736)가 작곡한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소프라노 부분을 완벽하게 감동적으로 불러서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노래 한 중세 시대의 시이다. 창작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교황 인노첸시오 3세,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라코포네 다 토디, 요하네스 보나벤투라 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총 20절의 3행시로 이루어져 있다.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Pergolesi: Stabat mater, for Soprano & Alto https://youtu.be/FjJ02agjjdo?si=gOGr_yoklXxakKkR 여기를 참조하세요 파라디스가 유럽 연주여행에서 얻은 성공 파라디스는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었지만 성악가로, 피아니스트로, 작곡가로 열심히 실력을 연마해 나갔다. 파라디스는 빈에만 머물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을 위해 나무로 작곡판을 만들어 준 어머니 요한 리딩거(Johann Riedinger)와 함께 유럽 연주여행을 떠났다. 가장 먼저 1783년 8월에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트의 집을 찾아갔다는 것이 모차르트의 누이 난네를의 일기에 남아있다. 모녀는 잘츠부르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와 다른 독일 여러 곳에서 연주여행을 마친 후 1784년 3월에는 파리를 방문했다. 4월에 파리(Paris)의 콘서트 스피리투엘(Concert Spiritue)에서 열린 연주회를 마친 파라디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파리의 주요 일간지 ‘Le Journal de Paris’의 리뷰 기사는 “그녀가 연주한 터치의 정확성, 유창함, 생생함은 끝없는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감동을 주었다”고 전했다. 파라디스의 연주는 파리를 감동시켰고, 발렌틴 아우이(Valentin Haüy,1745~1822)가 프랑스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를 설립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발렌틴 아우이는 당시 고대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등 10개의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숙련된 언어학자로 루이 16세로부터 ‘왕의 통역사’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평소에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자 작성방법을 개발하고 있던 그는 파라디스의 천재적인 연주로 인해 충동을 받고 1784년 9월에 발표한 양각문자 발명의 성공을 계기로 다음해인 1785년에 청소년을 위한 시각장애인 학교를 설립했다. 이어서 루이 16세의 지원을 받아 그 다음해인 1785년 12월 26일에 이 학교를 프랑스 왕립 시각장애인 청소년기관으로 승격시켰다. 파라디스는 1784년 후반에 영국 웨스트민스터에서 수개월 동안 지내며 법원과 칼튼 하우스(웨일즈 왕자의 타운 하우스), 하노버 광장의 전문 콘서트에서 공연했다. 그녀는 조지 3세 앞에게 헨델의 푸가를 연주했고 나중에는 첼리스트인 웨일스 왕자와 함께 연주했다. 런던 타임스(Times of London) 기사에는 그녀에게 ‘눈 가린 요술사’라는 애칭을 붙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의 ‘시칠리안느’ ‘Sicillenne’ by Maria Theresia von Paradis https://youtu.be/k8WEDXOQlC8?si=ryDKhuRYObXVN8AJ 여기를 참조하세요 파라디스는 계속해서 서유럽(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를 만난 함부르크 포함) 순회공연을 펼친 후 베를린과 프라하를 거쳐 1786년에 비엔나로 돌아왔다.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파라디스는 피아노 독주곡뿐 아니라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도 작곡하기 시작했다. 현재 확인된 파라디스의 초기 주요작품은 1784년에서 1786년 사이에 작곡된 '여정 가운데 만든 12곡(Zwölf Lieder auf ihrer Reise in Musik gesetzt)'이 있다. 1789년부터 파라디스는 연주보다 작곡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797년까지 그녀는 5개의 오페라와 3개의 칸타타를 작곡했지만 1797년 오페라 ‘리날도와 알치나(Rinaldo und Alcina)’가 실패한 후에는 가르치는 일에 더 힘을 쏟았다. 1808년, 파라디스는 빈에 자신의 음악 학교를 설립했다. 어린 소녀들에게 노래, 피아노, 이론을 가르쳤다. 이 학교에서 열린 일요일 콘서트 시리즈에서는 뛰어난 학생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는 1824년 사망할 때까지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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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㊴ 빈(Wien) 음악가협회(Tonkünstler-Societät)[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아버지를 울린 모차르트 음악회 아버지 레오폴트가 빈(Wien)에 도착해 모차르트의 집에 머물며 지낸지 한 달이 지났다. 레오폴트와 함께 지내는 동안 모차르트를 중심으로 '빈 음악가협회'에서 개최하는 음악회와 아카데미가 계속 이어졌다. 이 시기는 모차르트가 빈에서 성공을 이루었던 정점의 시기였다. 1785년(29살) 3월 10일에도 빈의 부르크극장(Burgtheater)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모차르트는 이 연주회를 아버지와의 불화를 종식하는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연주곡은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K.467)를 준비했다. 화려하고 당당하게 행진곡 풍으로 시작하는 1악장은 목관과 금관이 팀파니와 어우러지며 피아노와 함께 빠르고 장엄하게 변화무쌍한 화음을 전개한다. 2악장은 아련하게 가슴에 스미는 애틋한 슬픔, 3악장은 밝고 경쾌한 수다스러운 개구쟁이를 관현악이 포근하게 받아주는 모습이다. 그래서 21번 C장조를 ‘미소와 슬픔의 2중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곡의 2악장 안단테(Andante)에서 독주자 모차르트의 왼손이 연주한 셋잇단음표는 아버지가 작곡한 피아노소나타 C장조의 느린 악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지금까지의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운 작품에 취해 기쁨을 느끼던 레오폴트는 자신이 작곡한 소나타의 리듬이 재현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의 아름다운 2악장 안단테는 지금도 많은 영화의 배경음악이나 광고음악에 사용되고 있다. 특히, 영화 007시리즈 중에서 '나를 사랑한 스파이'와 스페인 영화'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 1967년)의 주제음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엘비라 마디간에서 안단테의 아름다움은 당시 17살의 발레리나를 전공한 배우 피아 디거마크(Pia Degermark, 1949~)를 단숨에 세계의 인기 스타로 만들어냈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1번 C장조 K.467 1악장 https://youtu.be/CLTs3Y5FV5A?si=y6Dsd9o2GDaRSA8o 위를 누르세요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1번 C장조 K.467 2악장 https://youtu.be/RU9dRIE7rII?si=IKDulJ_oU23A6OUS 위를 누르세요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1번 C장조 K.467 3악장 https://youtu.be/L5ulYOVgZqY?si=lMzO-cXF5eDENtDg 위를 누르세요 빈(Wien) 음악가협회(Tonkünstler-Societät) 모차르트에게 자주 연주 기회를 만들어 준 ‘빈 음악가협회’는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Leopold Gassmann, 1729~1774)이 주도하여 1771년에 설립한 빈 음악가들을 위한 자선 단체였다. 가스만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slio Salieri, 1750~1825)의 스승 중 한 사람으로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바로크 시대와 고전 시대 사이의 전환기에 활동했던 독일어권 보헤미안 오페라 작곡가였다. 협회의 목적은 '은퇴한 음악가와 그 가족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협회는 1772년부터 주요 고전 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대규모 연주자들과 함께 일련의 자선 콘서트를 개최했다. '과부와 고아 지원을 위한 빈 통쿤스틀러 협회'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 협회는 1811년에 음악애호가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가 설립된 때까지 빈에서 콘서트를 제공하는 유일한 민간 조직이었다. 이 기구가 지속적으로 존속하며 빈 악파와 고전음악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막중한 버팀목이 된 과정에는 교회의 지원과 음악가들의 고용주였던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역할을 하였다. 1741년에 부르크극장(궁정극장)을 설립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1771년 2월 23일에 협회 창립을 승인하는 법령을 반포하면서 협회 기금으로 500두카트(18세기 환율기준 약 1억 원)를 최초로 기부했고 그 뒤로 귀족들의 후원이 이어졌다. 고전음악시대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역사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자료를 남긴 카를 폰 진첸도르프 백작(Count Karl von Zinzendorf, 1739~1813)은 당시 ‘음악가협회’의 자선음악회에 참석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귀족들의 의무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작센-오스트리아의 공무원에서 트리에스테(Trieste) 주지사를 포함한 다양한 직위로 오스트리아 정부에 봉사했으며 합스부르크 궁정 고위직까지 오르는 66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썼다. 빈 음악가협회에 가입할 수 없었던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하여 협회에 처음으로 등장했었던 1781년 4월 1일과 3일의 콘서트에는 바이올린 40명, 비올라 8명, 첼로 9명, 콘트라베이스 11명, 플루트 2명, 오보에 7명, 바순 6명, 잉글리시 호른 2명, 호른 4명, 트럼펫 2명, 팀파니스트 1명 등 총 92명의 단원과 합창단 54명으로 총 146명의 연주자가 고용되었다. 1781년에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의 규모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을 알리고 협회의 콘서트에서 그의 교향곡이 얼마나 잘 연주되었는지에 대해 기쁨을 표현했다. 빈 음악가협회에서는 회원들이 사망할 경우 그 유족들에게 일정한 연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당시에 고용에 대한 불안과 적은 수입에 고민이 많았던 모차르트는 협회 가입을 희망하며 4년여를 보내던 차였다. 모차르트는 2월 11일과 3월 15일에 두 번에 걸쳐 협회 가입을 신청했다. 그러나, 다른 조건은 충족되었지만 출생증명서가 제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청 절차가 지연되었다. 모차르트는 빈에서 멀리 떨어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기에 출생증명서를 제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불편한 상황으로 기회를 살피느라 계속 지연되었다. 결국 두 번째의 약속까지 지키지 못하고 8월 24일에 또다시 연기 통보를 받았다. 모차르트의 빈 음악가협회 가입 지연은 훗날 1791년에 모차르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남긴 많은 빚과 두 명의 어린 자녀를 맡게 된 아내가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다행히 나중에 아내 콘스탄체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용기 있는 사업가로 매진해 남편의 작품으로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협회에 가입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모차르트 삶의 일면이었다. 유럽 음악계의 모범이 된 빈 음악가협회 음악사의 관점에서 볼 때 협회의 가장 큰 의의는 사회적 약자의 후생 지원에 있었으며, 그 이후에는 오늘날까지도 호평을 받고 있는 음악 작품을 초연하거나 보급하는 데 중요한 소임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빈 음악가협회는 오스트리아 제국뿐만 아니라 베를린(1801)과 상트페테르부르크(1802)에서도 유사한 조직의 모델로 사용되었다. 협회의 공연은 부활절 시간에 두 번, 크리스마스 직전에 두 번 등 수년에 걸쳐 상당히 일관되게 유지된 일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초창기에는 조직이 상당히 모험적이어서 새로운 작품이나 최신 작품을 공연하였다. 1862년에는 하이든의 이름을 앞에 넣어서 '하이든: 비엔나의 과부 및 고아 돌보기를 위한 음악가 협회'로 불렸다. 이 협회는 1939년 3월 9일 독일 국가 사회주의 정부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이를 폐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이후에는 다른 곳에서 공개 콘서트가 번창하고 협회 자체 프로그램이 보수적으로 변화하면서 협회의 역사적 중요성은 줄어들었고 음악 학자들의 연구 분야에서도 조직에 대한 언급은 점차 줄어들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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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㊳ 빈 (Wien) 에서 재회한 아버지와 아들[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㊳ 빈(Wien)에서 재회한 아버지와 아들 모차르트의 누나 마리아 안나(난네를) 모차르트에게는 누나 마리아 안나(Maria Anna Walburrk Ignatia Mozart, 1751~1829)가 있었다. 난네를(Nannerl)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누나는 모차르트보다 5살 위였다. 난네를은 7살 때부터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하프시코드를 배우고, 모차르트와 함께 유럽의 여러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녔다. 초반에는 뛰어난 연주솜씨로 가족 중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얻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가자 집안 살림을 도맡으면서 연주여행에 동행할 수 없어 예술적 재능을 나타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결혼문제에 있어서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삶과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하였지만, 난네를은 아버지에게 순종하였다. 본인의 성품을 논하기 전에 사회적 환경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여성에 대한 당시의 야만적 시대 배경은 난네를로 하여금 스스로 종속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는지도 모른다. 난네를은 육군 대위이며 가정교사인 프란츠 디폴트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아버지의 강요에 맞서 누나의 의지를 관철해야한다는 모차르트의 간절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난네를은 1784년 8월 23일 지방 치안판사 요한 폰 조넨부르크(Johann Baptist Franz von Berchtold zu Sonnenburg, 1736~1801)와 결혼하였다. 조넨부르크는 두 명의 전처와 사별하고 이미 다섯 명의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난네를은 결혼식을 마치고 잘츠부르크에서 동쪽으로 29km 떨어져있는 장크트길겐에서 거주하였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지만 남편과의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다. 조넨부르크는 1801년에 사망했다. 난네를은 50세에 미망인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20년 간 피아노 교사로 지냈다. 그 뒤 앞을 못보는 장님이 되어 9년을 더 살다가 1829년 78세로 잘츠부르크에서 생을 마쳤다. 누나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모차르트 평생 동안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모차르트는 자신의 결혼식에 불참했던 아버지 레오폴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다음 해인 1783년에 아내 콘스탄체와 같이 고향 잘츠부르크를 방문했지만 소원해진 아버지 그리고 누나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성공적인 빈 생활 가운데에도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모차르트는 174명의 예약자 명단을 꼼꼼히 기록하여 보냈던 1784년 3월 20일의 편지 이후에도 계속하여 서신을 보내(4월 10일, 4월 24일, 4월 28일, 5월 26일) 현재 빈에서 전개되는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지속적으로 아버지 레오폴트를 빈으로 초대했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사정이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마음은 빈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궁정악단에서의 위치가 자유롭지 않아 선뜻 잘츠부르크를 떠날 수가 없는데다가 나이가 들어가는 난네를의 결혼식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차일피일 빈 방문을 미루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1784년 후반기부터 오페라 ‘후궁탈출’의 상설공연과 예약연주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작곡 주문과 렛슨이 늘어나고 바쁜 일정으로 난네를의 결혼식에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콘스탄체가 둘째 아이를 임신하여 9월경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결혼을 앞둔 누나 난네를에게 보낸 모차르트의 편지 모차르트가 누나 난네를에게 - 빈에서, 1784년 8월 18일 자, 큰일났네! 누나가 아직 베스타의 무녀(순결한 처녀를 뜻함)인 동안에 내 편지가 도착하려면 지금 바로 써야겠네요! 2, 3일 뒤면 늦을 테니까. 아내하고 나는 누나의 신분이 바뀐 다음으로는 온갖 행복과 즐거움이 있길 바라고 있어요.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형편상 누나의 결혼식에 갈 수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내년 봄에는 틀림없이 잘츠부르크나 장크트길겐에서, 폰 존넨부르크 부인이 된 누나와 그 남편을 포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이제는 우두커니 혼자 지내시게 된 아버지가 가장 안됐네요! 물론 누나는 아버지 계신 곳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당시 마차로 6시간 정도인 거리) 때때로 누나 있는 곳으로 마차를 타고 놀러 갈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그 지긋지긋한 음악당에 매여 계시죠!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입장이었더라면, 그렇죠, 그렇게 오래도록 근무했으니 대주교에게 은퇴 신청을 해서 연금을 받으며, 장크트길겐에 있는 딸에게 가서 조용히 살 텐데 말예요. 대주교가 그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해고를 청구해서 빈의 자식(모차르트 자신)에게 가는 거예요. 그래서 누나에게 가장 바라는 건, 그런 식으로 처신하시라고 아버지를 설득해달라는 거예요. 나도 오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런 이야기를 썼어요. 누나를 위해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또다시 1,000번의 축하를 보낼게요. 특히 두 사람이 우리 두 사람처럼 사이좋게 살아가길! 그럼 이만. 이때의 편지에는 아직도 오누이 간의 따뜻한 사랑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난네를 결혼식 불참과 아버지 레오폴트의 죽음 이후에는 두 사람 사이의 우애가 점점 스러져갔다. 레오폴트의 빈 방문 레오폴트는 난네를의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야 빈 방문계획을 세웠다. 다음해 1785년 1월 모차르트가 있는 빈을 방문하기 위해 장크트길렌에 살고있는 난네를에게 편지를 보내 모차르트가 보낸 편지내용을 설명하며 빈으로 떠나겠다는 뜻을 알렸다. 아버지 레오폴트가 딸 난네를에게 - 잘츠부르크에서, 1785년 1월 22일 ..... 바로 지금, 네 동생(모차르트)에게서 10줄 가량의 편지를 받았다. 그 안에는 최초의 예약 음악회가 2월 11일에 시작, 매주 금요일에 계속된다는 것, 사순절 제3주째의 무슨 요일인가에는 틀림없이 극장에서 하인리히(마르샹, 오스트리아 주재, 프랑스계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를 위한 음악회가 있으니 나에게도 빨리 오라고 하는구나. 지난 토요일에 6개의 현악 4중주곡(이른바 하이든 헌정 곡)을 아르타리아(빈의 음악 출판사)에 팔아, 100두카텐을 벌고 그 곡을 사랑하는 친구 요제프 하이든과 그 밖의 친한 친구들에게 들려줬다고 쓰여 있더라, ‘마지막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협주곡(피아노협주곡, K 466)에 다시 매달려야 합니다. 안녕히!’라고 되어 있다. …… 1785년 2월 11일(모차르트 29살), 아들을 만나기 위해 잘츠부르크를 떠난 레오폴트는 빈의 ‘피가로 하우스’ 입구에 멈춰 선 마차에서 서서히 발을 내디뎠다. 집 앞에서 아버지의 마차를 기다리던 모차르트는 2년 만에 만나는 레오폴트를 뜨겁게 안았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집을 보고 눈이 크게 떠졌다. 잘 꾸며진 거실과 당구대까지 놓여 진 건물 내부에서 아버지는 미소를 머금었다. 레오폴트가 놀랄만한 이 집은 모차르트가 지난 해에 새로 이사 온 저택이었다. 작년 9월 21일, 둘째 아들 카를 토마스가 태어나고 며칠 후 모차르트 부부는 슈테판대성당 뒤편 돔가세(Domgasse) 5번가로 세 번째 이사를 했었다. 이 집은 빈에서 가장 유명한 로코코풍의 건물로, 집세도 지난번에 살았던 그라벤(Graben) 29번지 아파트보다 세 배가 넘었다. 그라벤의 아파트는 3개월에 65플로린(18세기 환율로 약 325만원)이고, 돔가세의 카메시나하우스(Camesina Haus)는 3개월에 230플로린(18세기 환율로 약 1100만원)이었다. 카메시나하우스는 나중에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하였다고 하여 ‘피가로하우스’로 불리게 된다. 그날 저녁 빈(Wien) 음악가협회(Tonkünstler-Societät)에서 주최하는 음악회에서 레오폴트는 피아노협주곡 20번(K.466)을 연주하는 모차르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음날 2월 12일 레오폴트는 드디어 요제프 하이든을 만났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함께 연주한 현악4중주 세 곡을 마치고 나서 레오폴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에게 맹세하고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합니다. 당신의 아들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레오폴트는 2월 14일에 잘츠부르크의 난네를에게 하이든이 모차르트에 대해 말한 칭찬과 모차르트가 빈에서 귀족들과 교유하며 자랑스럽게 지내고 있다는 내용을 편지에 써서 보냈다. 그리고 4월 25일까지 약 2개월 정도를 지내는 동안 모차르트에 대한 걱정과 불만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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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㊲ 절정에 이른 모차르트의 명성[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최초의 유료 예약연주회 1784년(28살) 1월, 모차르트는 빈(Wien)의 그라벤(Graben) 29번지에 있는 트라트너호프(Trattnerhof)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건물주인 트라트너는 출판업과 서점을 경영하는 재력가로, 모차르트를 후원하기로 하고 자신의 아래층을 제공하였다. 이 아파트는 연주홀과 카지노방이 별도로 있는 매우 큰 건물이었다. 그의 부인 테레제 포 트라트너는 모차르트의 제자였다. 이들 부부는 모차르트 자녀들의 대부, 대모가 되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2월 9일부터 자신의 곡에 번호를 붙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피아노협주곡을 연이어 작곡하면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첫 번째로 번호를 기록한 곡이 피아노 협주곡 내림마장조(K.446)였다. -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k.~’로 분류하는 쾨헬번호는 모차르트가 사망한지 71년 후인 1862년에 루트비히 폰 쾨헬(Ludwig von Köchel, 1800~1877)이 붙이기 시작한 것으로 당시 모차르트가 붙인 번호는 이것과 다르다] 1784년 봄, 모차르트는 빈 음악계의 인기 음악가가 되어 있었다. 음악애호가들의 관심이 모아지자 모차르트는 새로운 모험을 시도했다. 트라트너의 소개로 알게 된 두 명의 파트너 G.F 리히터(네덜란드의 피아노 교사)와 L. 피셔(성악가, 베이스)에게 자신이 새롭게 작곡한 세 곡의 피아노협주곡(K.449, K,450, K451)으로 예약연주회를 개최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의기투합한 세 사람은 3월 17일부터 매주 수요일(3월 17일, 24일, 31일)에 트라트너호프 아파트 연주홀에서 연주회를 열기로 하고 예약회원을 모았는데, 174명이 모집되었다. 굉장한 호응이었다. 예약권은 한 사람당 6플로린, 모두 합쳐 1,000플로린(약 5,000만원, 18C까지의 통화환산기준)이었다. 모차르트는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 빈에서, 1784년 3월 20일 제 예약자 전체의 리스트입니다. (174명의 예약자 이름을 꼼꼼히 기록한 다음) 저 혼자서, 리히터와 피셔가 모은 것을 합친 것보다 30명이나 더 많은 예약을 모집하였습니다. 이달 17일의 첫 발표회는 잘 진행되었습니다. 홀은 꽉 찼고요. 그리고 제가 연주한 새로운 협주곡(피아노협주곡 K 449)은 매우 인기를 끌어서, 어디를 가나 이 발표회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내일 극장에서 제 첫 발표회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루이 리히텐슈타인 후작이 자신의 저택에서 오페라를 열고 중요한 귀족들을 제게서 빼앗아 갔을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가장 우수한 멤버까지 끌어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쇄한 포스터를 만들어 발표회를 4월 1일로 연기했습니다. (후략) 모차르트는 세 곡의 협주곡 오케스트라 구성에서 관악기를 생략하고 실내악 형태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성하여 직접 초연했다. 청중들의 열렬한 반응은 모차르트에게 좀 더 깊이 있는 곡을 보이고 싶은 동기를 불어넣었다. 트라트너의 연주홀에는 흥분과 감동이 가득했다. 이 곡은 그가 자신의 음악 노트에 입력한 첫 번째 작곡으로, 이후 7년 동안 주요 주제, 완성 날짜 및 기타 중요한 정보를 기록하여 보관했다. 다음 연주는 루돌프 부흐빈더(Rudolf Buchbinder, 1946~)가 140년 전, 빈에서의 모차르트처럼 직접 지휘하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영상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14번 내림마장조 K.449 Concerto for piano & Orchestra No.14 in Eb major 제1악장 알레그로 비바체(Allegro vivace) 제2악장 안단티노(Andantino) 제3악장 알레그로 마 논 트롭포(Allegro ma nontroppo) 루돌프 부흐빈더(Rudolf Buchbinder, 1946~)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생으로 현재 오스트리아의 세계 정상급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2007년부터 그라페네그 축제(Grafenegg Festival)의 예술 감독을 맡고 있다. 새로운 음악문화 출현 연주회장은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가득 찼고, 새로운 협주곡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에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파리의 살롱 음악회의 관객은 주로 여성들이었는데, 빈의 청중은 80퍼센트 이상이 남자였다. 청중 명단에는 고위 귀족이 50퍼센트가 넘었다. 3월 하순부터는 트라트너호프 아파트 외에도 하이든이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에스테르하지 미코로스 백작의 초청으로 연주회를 열었다. 모차르트의 명성은 절정으로 향했다. 그는 빈의 다른 음악가들과는 뚜렷이 다른, 확고한 음악회를 펼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인기는 음악 출판에도 영향을 주었다. 1783년에는 가장 초기의 독일어판 정기간행 음악잡지인 ‘마가진 데 무지크(Magazin der Musik)’에 ‘이 작품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으며 작곡가의 위대한 음악적 천재성의 흔적들이 넘친다’고 빈 특파원들이 보도했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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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㊱ 프리메이슨과 모차르트의 인생 후반[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free mason) 인류사에 이름을 남긴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갔다. 그 가운데 한사람의 음악가로 살다간 모차르트도 비록 35년의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짧고 굵게 치열한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며 음악을 만들었다. 작곡과 연주를 통해 인생의 역경과 고난에 대한 투쟁, 잠시나마 자신을 품어 준 행복과 환희, 그리고 그가 꿈꾸던 상상의 세상을 표현하였다. 모차르트의 일생에서 프리메이슨은 매우 중요한 관계를 형성한다. 1784년(28살) 12월 14일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고, 프리메이슨의 사상이 표현된 작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단체의 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헌신하여 마스터 메이슨(Master mason)의 위치에 일 년 만에 올라가기도 했다. 프리메이슨 장례음악(Maurerische Trauermusik) C단조 K.477 이 곡은 갑작스럽게 연이어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 형제 중 두 명인 게오르그 아우구스트 공작(Duke Georg August)과 프란츠 에스터하치 백작(Franz Esterházy)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하여 1785년 11월 17일에 거행된 프리메이슨 장례식에서 자신의 지휘로 연주한 작품이다. 약 6분이 소요되는 C단조 K.477은 시작부터, 죽음으로 이별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쓰라린 슬픔이 펼쳐지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유발한다. 목관악기의 화음이 흐느낄 때, 깊은 한숨이 심장을 뛰게 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의기투합했던 동료를 보내는 애절한 아픔이 전이되며 통곡을 부른다. 이 작품은 2개의 오보에, 1개의 클라리넷, 3개의 바셋 호른, 2개의 콘트라바순, 2개의 호른과 트럼펫, 3개의 트럼본, 팀파니 및 현악기 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존경하는 젋은 두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작곡한 프리메이슨 장례음악(Maurerische Trauermusik) 자필 악보는 베를린 주립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https://youtu.be/KM3S_2pjiRE?si=suaB50-xLLb7fIqs 프리메이슨의 유래 프리메이슨은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구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직이다. 원래는 1220년경에 영국의 교회 건물을 주로 건축하던 석공들의 단속을 위해 구성된 ‘런던 석공 동업조합(London mason guild)’으로 출발하였다. 조합에서는 차지(charges)라고 하는 규율로 석공들을 통제하고 의무를 규정하였다. 석공들은 마스터와 고용주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의 기술과 조직에 대하여 비밀을 지켜야했다. 이후 이 조직은 1717년 영국에서 최초로 건축기술의 연구와 숙련자 양성 그리고 신앙과 도덕을 지키며 지식을 연마하는 것을 목적으로 공식적인 단체로 창립된 후, 자유ㆍ평등ㆍ박애를 기본정신으로 삼아 인도주의, 시민주의, 박애주의를 지향하며 1725년에는 프랑스에, 1742년에는 오스트리아에 조직되었다. 독일,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위스로 확산된 프리메이슨은 인도, 북아메리카 등 영국의 식민지로 범위를 넓혀 미국까지 퍼져나갔다. 프리메이슨은 유럽의 계몽주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각 나라별로 독자적인 발전과 단체의 존속을 이어갔다. 회원끼리는 자신들의 사상과 의견을 자유로이 표방하지만 외부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비밀결사체와 같은 인상을 보였다. 오늘날에도 세계 각처에서 조직을 확보하고 있는 프리메이슨은 이제는 비밀단체도 아니고, 계몽주의의 결과물인 자유, 평등, 형제애, 관용, 인간성 회복 등 5가지 정신을 표방하며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는 우애단체로 존재하고 있다. 특히 종교와 정치에 대한 논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삼고 있다. 권력자와 음악가들에게까지 스며든 프리메이슨 요제프 2세 황제는 가톨릭 신앙을 공고히 하고 계몽주의에 의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처음에는 프리메이슨에 대해 우호적 정책을 펼쳤다. 빈의 상류층과 지식인들에도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Ⅱ, 1712~1786)과 오스트리아의 국왕 요제프 2세 자신과 미국의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등도 이 단체에 소속되었다. 음악가들에게서도 큰 호응이 일어났다. 글루크,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하이든과 모차르트도 프리메이슨의 일원이 되었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적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깊은 내면의 소리가 우러나는 프리메이슨의 의식에 필요한 곡들을 많이 작곡하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요제프 2세는 프리메이슨 단체의 규모가 매우 급속히 늘어나고 크게 번성하게 되자, 개혁 통치에 장애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프리메이슨 활동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지만 모차르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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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도서관, 고품격 공연장으로 제공[전주=한국복지신문] 윤상현 기자= 책의 도시 전주의 도서관이 시민과 관광객이 품격 있는 음악 연주와 동화구연, 북토크 등 다채로운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제공된다고 12일 밝혔다. 이날 시는 올 한해 전주시립도서관 꽃심 1층 로비에서 ‘도서관 內 세계 음악 여행’ 을 주제로 정기 음악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전했다. 시는 도서관을 책과 음악이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Tutti 앙상블’ 과 협업해 공연을 기획했으며, 이달부터 올 연말까지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사전 예약 없이 자유롭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지난 2018년 창단한 ‘Tutti 앙상블’ 은 백제 문화제와 전주세계소리축제 등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실내악 전문 지역 예술인 단체로, 지난 2022년부터 30분간의 ‘찾아가는 틈새음악회’ 등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고품격 연주를 선보여 왔으며, 지난해에는 전주시립도서관 꽃심에서 동ㆍ서양을 아우르는 전문 음악공연을 선보인 바 있다. 또한, 올해 정기 음악공연은 ‘작곡가의 고향을 찾아 세계로 떠나는 음악여행’ 을 주제로, 각국 작곡가의 대표곡을 장르별 전문 연주가의 솜씨로 들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1월 첫 공연에서는 김민영 공연자 (판소리) 가 ‘한국 남도민요’ 를 주제로 ‘흥타령’ 과 ‘쑥대머리’, ‘성주풀이’ 등의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아울러, 오는 2월에는 조은비 연주자 (플루트) 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1756)’ 을 주제로 플루트 연주를 선보이며, 3월에는 유예슬 등 비올라 4중주가 ‘독일 본 (베토벤 1770)’ 을 주제로 무대에 선다. 이어, 매월 ▲4월 고은영 (오페라) 의 ‘이탈리아 페사로 (로시니 1792)’, ▲5월 임송이 (피아노) 의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1810)’, ▲6월 이현주 (동화구연) 의 ‘노르웨이 베르겐 (그리그 1843)’, ▲7월 한아름 (클라리넷) 의 ‘프랑스 파리 (생상스 1835)’, ▲8월 박달님 (가야금) 의 ‘한국 장흥 (최옥산 1905)’, ▲9월 김성민 (첼로) 의 ‘체코 프라하 (드보르작 1841),’ ▲10월 이은정 (바이올린) 의 ‘영국 우스터 (엘가 1857)’, ▲11월 송동건 (색소폰) 의 ‘미국 뉴욕 (앨런 멘켄)’, ▲12월 박태건 (북토크) 의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쇼스타코비치 1906)’ 주제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이강준 시 도서관본부장은 “짧은 시간이나마 시민들이 일상에서 문화ㆍ예술을 접하고 예술적 표현과 감상의 즐거움을 느끼는 선물이 되길 바란다” 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공연을 통해 책ㆍ문화ㆍ예술이 공존하는 복합문화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갈 것”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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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모차르트 이야기㉟ 고전주의 시대는 격동과 계몽의 시대[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정지훈 기자= 모차르트 이야기㉟ 고전주의 시대는 격동과 계몽의 시대 서양 음악의 시대 구분 인류와 함께해 온 음악은 언제나 문학과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왔다. 서양음악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음악사조의 흐름에 영향을 준 문예사조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문예사조는 미술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으므로 음악사조를 알려면 먼저 미술사조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미술사조는 중세시대,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추상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으로 시대를 구분하여 이어져왔다. 음악사조는 문학이나 미술 사조의 뒤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도 미술사조의 영향권 내에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20세기음악 등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 중 고전주의에서 고전은 클래식(Classic), 고전주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Classic Music)을 의미한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과 비교하여 서양음악 자체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고전주의 시대 음악(클래식 음악)은 음악사에서 1750년에서 1810년까지 60년 정도의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빈(vien)을 중심으로 발전한 음악을 가리킨다. 고전주의 음악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베토벤(L.V.Beethoven, 1770~1827)이었다. 독일문학에서 정의하는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근거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고전적이라고 표현하면서 고전주의 시대 음악이라는 구분이 시작되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역사적 배경 고전주의 시대는 계몽주의 사상의 시대였다. 바로크시대의 말미인 1680년경부터 유럽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계몽주의는 인본주의와 자유주의적인 사회풍조를 가져오면서 18세기 유럽에는 칸트(Kant)와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 등의 철학사상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에덤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은 경제학 분야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자연과학 분야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백신(vaccine)이 개발되고 증기기관, 방적기계, 전동기, 발전기 등이 발명되어 1750년경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의 여파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18세기 후반은 사회적 계급과 질서가 무너지는 격동의 시기였다. 사회의 변혁은 프랑스혁명으로 절정을 향해 나아갔다. 계몽주의적 가치관은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까지 널리 퍼져나가 미국의 독립선언을 촉진하기도 했다. 인도주의 이상은 미국 독립선언문으로 상징화되고 1717년에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지부가 설치되기 시작한 프리메이슨(Freemason)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밴자민 프랭클린(B. Franklin), 조지 워싱톤(G. Washington), 괴테(Goethe)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바로크시대 음악(Baroque Music) 예술을 즐기려는 욕구는 고전주의 시대 이전인 1600년에서 1750년의 바로크시대부터 팽배해 있었다. 왕족과 지배층 귀족들은 관현악단을 소유하고 연주자와 작곡가를 고용하여 새로운 곡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채워나갔다. 여기에다 부(富)를 축적한 중산층 사이에서도 음악을 즐기려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 평민을 대상으로 한 공연장과 공연이 점차 늘어났다. 바로크시대의 음악은 르네상스에서 애용되던 다성 음악을 넘어 기교적이고 화성적 경향이 강한 음악이 주를 이루었다. 바로크시대에는 작곡가 과잉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많은 음악 작품과 작곡가가 탄생했다. 바흐는 칸타타를 비롯한 종교음악에 혼신을 다했고, 헨델은 영국 오라토리오와 이탈리아 오페라 등 종교와 세속을 아우르는 작품들을 통해 교향곡의 범주를 확장시켰다. 이탈리아를 근간으로 생겨난 수많은 음악형식들은 바흐와 헨델을 정점으로 급격히 발전하였고 고전주의로 연결되었다. 고전주의 시대 음악(Classical Music) 고전주의 시대를 표상하는 음악사조의 근원은 이 시대를 풍미(風靡)했던 계몽주의 사상이었다.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자 극도로 과장되고 장식적이던 바로크 양식은 고전시대의 비율과 균형에 맞추어 절제되고 정돈된 교향곡과 현악사중주등의 형식이 자리를 잡았다. 고전주의 양식의 기초는 대(大)바흐의 아들들(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요한 크리스찬 바흐,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과 요한 슈타미츠로 대표되는 만하임 악파에서 시작되었다. 하이든은 바로크 시대에서 태동한 이 모든 장르를 완성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고전주의 시대를 펼쳐나갔다.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은 그 중에서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던 하이든, 모차르트, 글루크, 베토벤 등 4인의 음악가들이 주도하였다. 하이든의 일생은 커다란 사회적 변혁의 두 시대에 걸쳐있었다. 하이든은 음악가를 후원하는 귀족 지배층의 보호와 지원으로 음악에 전념할 수 있었던 마지막 작곡가였다. 고전주의 교향곡은 대부분 첫 악장이 빠르게 시작하여, 느리고 서정적인 둘째 악장으로 이어지고, 트리오나 미뉴엣 등의 춤곡이 세 번째에 나온 다음 빠른 네 번째 악장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런 구성은 수백 곡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하이든의 교향곡과 현악사중주곡에서 기틀이 잡히고 모차르트와 베토벤 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훗날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소나타 형식으로 불리게 되는 이러한 기악곡 양식은 교향곡과 현악뿐만 아니라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 연주자의 개인 기량을 아낌없이 발현할 수 있는 협주곡(Concerto)의 출현과 발전을 도출하였다. 하프시코드에 이어 안정적인 강약을 표현하는 피아노포르테(Piano)가 발명되자 독주 소나타는 모차르트 이후 더욱 사랑받는 음악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다음으로 이어짐) ◈ 본 전문가 컬럼은 한국복지신문과 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